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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men 그래픽노블 리뷰

altair823 2025. 2. 25. 17:47

서론

Who eatches the watchmen?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하는가?


예전에 '왓치맨'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철 지난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찾아보다가 마주쳤다. 칙칙하고 누가 누군지도 잘 구분되지 않는 포스터를 보며 다크나이트가 아니면 퍼니셔 비스무리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도 오래 전에 본 영화라 지금은 끝까지 프루딩딩했던 화면의 톤과 강렬하게 남은 감정만 남아있다. 부도덕한 히어로와 그의 죽음, 그를 둘러 싼 불가피한 음모에, 다른 히어로 영화와 달리 무거운 불편감을 가슴에 얹은 듯 했다. 줄거리가 아주 기억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생하지도 않은 탓에 여기서 영화에 대해 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희미한 시각적 기억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날 뇌리를 스친 '왓치맨'이라는 문자열에 난 홀린 듯이 왓치맨 만화책을 중고로 구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절판된 번역본이라 약간의 수고와 웃돈을 통해 겨우 살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래픽노블 '왓치맨'을 읽고 생각한 것들을 옮겨 적으려 한다. 

 

구성

먼저 형식적인 구성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책 전체에 걸쳐 번갈아 등장한다. 

- 마스크 쓴 히어로들을 연쇄적으로 살해하는 사건과 음모를 추적하는 로어셰크의 메인 플롯
- 이전 세대 히어로들의 영광과 추함을 소개하는 홀리스 메이슨의 자서전
- 난파선 이야기

이 이외에도 등장인물마다 각자의 과거 이야기와 사정들이 회상 같은 액자식 구성으로 들어가있다. 

 

핵무기와 인간성

파인만의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트리니티 핵무기 실험이 끝나고 거리를 거닐다가 문득 거리에서 본 다른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이 다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고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건축물도,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핵폭발 한 번이면 모두 사라지는데 말이다. 

아마 냉전 핵전쟁 위협 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책 전반에 걸친 푸르스름한 톤은 마치 방사능이 빛나는 체렌코프 현상이 삶 전반에 음울하게 덮어 씌워져 있는 듯 보이게 만든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모든 삶이 핵무기라는 의미론적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가? 아니, 찾을 수는 있는가? 존재한다고 말 할 수라도 있는가?

등장인물인 코미디언은 그저 웃어넘긴다. 과거와 미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면 오로지 현재가 의미있다.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고 도덕도 신경쓰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서도 살육을 즐겼던 그가 절망한 순간은 오지만디아스의 잔혹한 계획, 수 백만을 죽여 전 세계를 위기에 맞서 화합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보았을 때였다. 인간성의 조건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그의 웃음도 무너졌다. 

작가는 그래픽의 저변에서 끊임없이 인간성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인간성에 대한 허무

핵무기의 위협 속에서 냉전시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만 걱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허무에 대해 고민했다. 수십 년간 쌓아온 노력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인간관계가 단 몇 사람의 버튼 딸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증명되었을 때, 이성과 합리는 무너지고 포스트 모더지즘의 해체가 찾아왔다. 어떤 위대한 이성도, 심지어 그 기록조차 압도적으로 야만적인 파괴 앞에서는 먼지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허무는 바로 인간성에 대한 허무인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문학 작품들은 이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다고 느꼈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소련의 굴라그를 고발하는 책이지만 열악한 통제 환경 속에서 손가락만한 소세지를 나누어 아껴먹고 한 컵 겨우되는 묽은 양배추죽을 빳빳이 고개들고 먹으며 존엄을 지키는 사람들과, 남의 침대를 뒤지고 남이 먹고 남은 그릇의 바닥을 핥는 자들을 묘사하며 인간성의 파노라마를 그린다. 

슈피겔만의 만화 '쥐'는 홀로코스트를 겪는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성의 말살을 그린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무사유의 톱니바퀴들이 어떻게 수 많은 인격을 가스실로 보냈으며 그 중 일부는 또 어떻게 와중에도 인간성을 지켰는지 보여준다. 

왓치맨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핵무기의 위협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가? 위협을 극복하고 분열을 막으며 적과 손잡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작 중 에이드리언이 그랬듯, 궁극적인 화합을 위해 인간성을 버릴 준비가 되었는가? 작 중에서 표현하듯이 미국과 소련의 화해를 위해 외계인의 침공을 가장하여 수 백만의 사람들을 살해할 수 있는가?

마치 자연의 압도적인 힘과 동시에 압도적인 무관심을 인격화한 듯한 닥터 맨하탄은 에이드리언의 잔인한 계획의 결말을 본 뒤 어쩔 수 없이 납득한다. 인간성 없는 자연은 더 큰 악을 위한 차악에 납득하는 것이다. 반면 죽기 마지막 전까지도 악과 타협하지 않은 로어셰크는 아무리 거대한 선이 뒤따라오더라도 어떠한 악도 허용할 수 없으며 여기에 타협은 없다는 것을 결심한다. 본인이 닥더 맨하탄에게 터져 죽는 그 순간까지 그는 목숨보다 인간성과 진실을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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